🌗「스토킹 체르노빌 : 파멸 이후의 탐사」 들다방 상영회에 초대합니다.
🧫2023년부터 시작되어 최근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6만 톤 이상의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가 바다로 방류되었고, 국내 노후 원전의 가동 시한이 차례차례 연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상영회를 진행합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간단한 이야기 자리를 갖습니다.
🎬상영회는 동아시아 에코토피아와 들다방이 협력하여 준비합니다.
📑공동체 상영 참가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구글폼을 통해 사전 신청을 받습니다. (들다방 프로필 링크)
다큐멘터리 「스토킹 체르노빌 : 파멸 이후의 탐사」 상영회
🎬 상영 정보
감독 : 이아라 리 iara lee
제작 연도 : 2020년
시간 : 58분
소개글 :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노심융용과 폭발이 발생해 방사성 물질이 유럽과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방사능 오염의 정도가 심각한 원전 인근 30km는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넘는 시간이 지난 뒤, 법을 위반하고 체르노빌 인근을 탐험하는 “스토커”들이 나타났다. 그들 외에도 익스트림 스포츠 애호가, 예술가, 그리고 관광업체가 이 지역에 접근하는 모습을 통해 오늘날 체르노빌을 둘러싼 상황을 살펴본다.
예고편(영어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QWaWaedzgxg
📅 일시 : 2024년 8월 21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 장소 : 들다방 (서울 종로구 동숭길 25, 4층)
🍿 무료 상영
📢 영화에는 한글+영어 자막이 있습니다. 이야기 자리에는 문자통역이 제공됩니다.
*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4년 예술로 기획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주최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관 : 들다방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스토킹 체르노빌〉(2020) 들다방 상영회 속기
-일시: 2024.08.21.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들다방 카페테리아. 속기 요약 시작-
=영화 초반 자막에 나오듯, 이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 <스토커>(1979)에 경의를 표하며 시작된다.
스토커Stalker/스토킹Stalking이란 잠입자, 침입자, 그리고 그들이 출입금지 지역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처분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들의 행위를 어떻게들 보셨는지.
= 자기 자유를 위해서 ‘스토킹’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익스트림 스포츠와 남성성의 관계, 도파민, 모험 스토커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 체르노빌을 스토킹하는 행위는 특별한 경험에 대한 보편적인 욕구, 욕망을 건드린다. 익스트림과 새로움을 욕망하는 사람들을 유입시킨다.
=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영화가 현실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스토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궁금하다. 적어도 영화는 판단을 보류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 한국에 와 GV를 가진 것으로 아는데.
= 감독님은 한국계 브라질인. 한국에 방문, 한국에 오는 김에 상영하고 관객을 만나고 싶어하여 상영회를 꾸미고, ‘변두리 상영회’를 했다. 그때 감독은 스토커의 행동을 판단하는게 아니라 관객이 직접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 ‘감독도 스토커 아닌가?’ 할 수 있다. 스토커를 추적하기 때문에 스토커와 같은 입장으로 보일 수 있지만, 기록하는 사람, 알려야 한다는 저널리스트로의 사명감이 느껴졌다.
= 체르노빌 사고가 터졌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들어가 기록했던 선배 감독의 입장, 그곳에 남겨진 동물을 위해 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입장처럼 느껴졌다.
= 후쿠시마에도 소를 키우면서 팔지도 못하고 살처분도 못하고 같이 살고 있는 분이 있다.
= 익스트림을 위해 온 이들의 입장도 담겼지만, 감독의 사명감도 담겼다. 기록의 입장과 스토커가 느끼는 도파민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을 듯하다.
= 이 영화를 한국에서 2023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전에 상영했었다. 2024년 지금까지 오염수 방류의 문제들이 지속되고 있다.
= 감독님이 계셨을 때 나왔던 질문과 나눴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 있었는가?
= 시기적으로 후쿠시마 이야기를 했고 왜 계속 반복되는지, 스토커는 시스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 왜 바뀌지 않는지 등.
= 후쿠시마의 경우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특히 일본 정부가 나서서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했고, 그래서 도쿄올림픽도 진행됐다. 그러나 개인이 가고 싶어서 자유롭게 가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즈마 히로키 비평가의 경우 ‘후쿠시마를 관광사업화하자(다크 투어리즘), 새로운 비지니스 찬스이다’고 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 일본 내 좌파들의 입장은, ‘후쿠시마, 방사능에 반대할 거라면 후쿠시마를 직접가서 경험하고 말해야 한다’ 하는 정서를 가졌다. 비판하려면 몸으로 직접 느끼고 경험해한다는 위험한 발상을 가졌었다.
= 엄밀히 말하면, 영화 속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고 나오는 나온 쓰나미 영상 속 장소는 후쿠시마가 아니다. 대지진이라는 사건 자체를 이미지로서 사용하신 것 같다. 무신경하게 , 무지에서 비롯된 연출이었던 듯하다.
= 현장에 가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정서는 위험하다. 더욱이 고등학생을 데리고 후쿠시마 현장을 방문하거나 현장에 가서 경험해야지만 말할 자격이 있고 비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 한국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다. 현장에서 희생을 감수해야지만 자격 있다는 것은 어떤 사고와 질환과 장애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비장애인의 건장한 몸, 남성성의 과시일 수도 있다.
= 감독 또한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건을 기록하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체르노빌에 방문했던 감독을 존경한다고 영화에 언급. 이 영화 감독의 입장 또한 그가 존경하는 감독의 입장과 같다고 보인다.
= 체르노빌을 스토킹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가진 자유, 개인의 행복, 취미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그들은 말한다. ‘방사능은 두려워하는 자에게만 온다’. 영화에서 말하듯 방사능은 색도 없고 몇 년, 몇십 년, 몇백 년에 걸쳐 어떤 모습으로든 발현될 수 있다.
= 당장 티나지 않아서 안전하다고 국가에서 나서서 홍보하기 쉽니다. 일본 동일본 대지진 후에도 그곳에서 나온 채소를 전국적으로 홍보한다든지 함께 먹어주기 등의 운동을 벌여 국가적 역경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 스토커는 위험성을 몰라서 체르노빌을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기 경험으로서의 증거로 그곳에 계속해서 가는 것 같다. 영화는 돌려말하는 방식으로 경고, 생각은 해보자는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체르노빌을 스토킹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는 맞지만 안전이라는 것, 체르노빌, 후쿠시마 갑자기 찾아온 재앙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 스토커들이 자신의 경험과 기준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 사람이 감각할 수 없는 위험을 안고가는 방식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 원자력 산업을 옹호하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생각이 든다.
= 스토커들이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다니면서 잠깐 측정을 해보고 방사능에서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 체르노빌 핵발전소 멜트다운(노심 용융)은 국제적인 사건. 아직까지도 피해자가 있고, 트라우마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자유의지로 스토킹하며 즐기는 방식이 대조적으로 보였고,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더욱더 위험을 느꼈다.
=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원전 사고 지도는 시간적으로 역순이었는데, 히로시마라든지 비키니섬에서 이뤄진 핵무기 실험 등에 대한 연도 표기는 안 담겨 있었다. 평화적 이용 이외의 경우만 적은 것인지.
= 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영화가 떠올랐다. 핵을 사용해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 개발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그 때의 논의는 현재도 계속될 수 있다.
= 초등학교 재학 시절 내가 살던 지역에서도 핵발전소 노출 사고가 있었다. 안전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 히로시마 원폭 다큐가 떠올랐다. 방사능 피해자분들이 원폭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 추적 검사를 했지만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치료를 안 한 것. 미국이 그때 치료를 해줬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책임, 배상을 하지 않기 위해 치료를 하지 않음.
= 일본에는 ‘원폭수첩’이란 게 있다. 할아버지가 군인이어서 히로시마로 시체를 치우러갔는데 거기서 피폭을 당했는데 폐암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할아버지의 수첩을 주었다 돈을 제대로 받은 것은 아니고 일본인이라서 그나마 보상을 받은 것이고, 일본은 한국인, 대만인 또한 원폭피해 인정 안 함.
= 원폭 피해 일본인도 자살로 많이 죽는다. 지원금이 끊기니 살 수가 없고, ‘원폭 피해자’라는 낙인이 작동해 트라우마, 이웃으로부터 배척, 한 동네에서 살 수 없다. 히로시마 생존자에 대한 히로시마 출신이라는 낙인.
=당시 조선인 피해자- 2세 이야기로 결혼이 반대된 사례. 단순히 신체적인 피해가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넣는다.
= 핵에 대한 반대를 말할 때 그 논리가 비장애인 중심적 사고일 때가 큰데, 이것 또한 문제다. 핵으로 인해 ‘기형아,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것. 그러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할 수도 있는데.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적인 언어 사용은, 대중에게 공포를 자극하기 쉬운 언어라서 그런 걸까.
= 영화 초반에 체르노빌을 두고 과학과 자연이 함께 있는 꿈의 도시처럼 그려진다. 그렇게 말하고, 주민들 삶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미 그 도시는 설계부터 원자력 발전소가 2.5km 내에 있는 곳이었다. 이미 위험이 내포된 곳, 사고를 통해 그것이 현실화된 것. 그런데 사고가 나기 이전 과거에는 완벽한 도시, 자연과 인간이 어울리는 도시로 여전히 기억되는 것도 소름이 돋았다. 문제가 나서 위험한 곳이 아니라 이미 기괴한 도시였다.
= 현재 원자력 지어지는 곳은 힘이 없고 일자리가 없는 곳.
= 수많은 사진작가와 예술가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에 후쿠시마로 들어가는 작업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 그곳에 살지 못하고 쫒겨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후쿠시마로 들어가 예술 작업을 하는 것이 그 장소를 대상화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자기 희생을 정당화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 저널리즘, 자기 희생을 보여주는 것. 원전 피해를 무릅쓰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행위를 아름답게 포장한다고 느껴진다. 방사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방사능을 증명할 수 없어서 이 사건을 무섭게 만드는 것. 그런데 이렇게 방사능을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을 ‘예민하다’고 치부하고, 그런 공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터부시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게 ‘후쿠시마가 무섭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존재를 지운다.
= 이 영화 또한 기록을 남겨야 하는 것은 맞지만, 여느 스토커처럼 함께 침입해 있다는 것,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점이 그런 두려움을 없는 것처럼 사고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영화를 보며 체르노빌 오염 소지가 있는 강물에서 물을 정수해 마시는 등의 행위는 이해가 안 갔지만, 한편으로 체르노빌에 남아 있는 고공의 폐건축물을 보거나, 그곳에서 텅 빈 도시의 밤의 풍경을 보니 아름다웠고 장엄함에 압도되기도 했다.
= 현장에 놓여 있던 인형들. 관광객들 누군가가 놓는 행위. 그 공간이 주는 독특함 때문에 매료된 것은 알겠지만 그 매료됨에 대한 불편함이 존재한다.
= 이 풍경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 유행하고 그 게임의 유저로서 현장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게임으로 보던 것을 실제로 보았어, 직접 보고 싶다는 감각은 누구나 가지는 욕망일 수 있다.
= 굳이 위험에 몸을 노출하는 스토커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 개인적으로 기후 위기 재난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큰데, 이것에 해방되기 위해 그곳을 찾아 정확한 공포를 마주해 보고 싶기도 하다. 적어도 막현한 불안이 정확한 공포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니. 직면해보니 극복할 수 있네라는 감각, 위험을 정복했다는 감각, 도시 안에서도 도시에서 벗어난 평화로움, 해방을 주긴 한다.
= 등장인물들 면면을 보니, 지역 특성인지 백인이 많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삶이 무료해서, 심심해서 가는 것 아닐까, 그저 레저로 느껴져서 불편했다.
= 방사능에는 국경이 없다. 체르노빌을 소재로한 영화, 다큐들이 체르노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전기 에너지 부족 때문에 원전이 필요한 것 아니다, 이미 있는 원전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원전이 한 나라에 만들어지는 것의 배경이 있다. 영향력이 있는 미국, 핵을 가지게 하는 것. 평화적 목적/비평화적 목적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 평화를 기원하며.
-속기 요약 끝-